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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묵상(181217)요일3:1-12

By December 25, 2018 No Comments

수학을 좋아하는 사람은 수학시간이 기다려집니다. 그러나, 싫어하는 사람은 그 시간이 참 힘듧니다. 똑같은 시간인데, 누구는 지옥이고, 누구는 천국과 같은 시간을 보냅니다. 왜냐면, 좋아하는 사람은 새로운 것을 ‘앎’에 대한 기대와 소망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더 궁금하고, 더 흥미로워집니다. ‘앎’에 대한 충족이 그를 행복하게 하기 때문이죠. 그에 반해 싫어하는 사람은 새로운 정보 자체가 괴롭습니다. 또 해야하고, 또 미궁속으로 빠져들어가야하는 힘겨운 싸움에 마음문이 닫혀버립니다. 좋아하는 이에게 ‘소망’이 싫어하는 이에게는 ‘절망’일 뿐입니다. 알면 알수록 더 알고 싶어지는 것이 그 특징이죠.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불러주신 것은 얼마나 큰 은혜인지 생각하면 할수록, 알면 알아갈수록 더 알고 싶어집니다. ‘하나님의 씨’가 그 속에 있는 사람의 특징입니다. 더 알고 싶고, 더 궁금해지고, 더 찾고 싶고, 더 배우고 싶고…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서 알아가려는 모습’이 힘듭니다. 찾아아고 배워가는 것이 부담스럽습니다. 그 자리가 불편하고 피곤합니다. 또 알아야하나?라고 하면서, 굳이 그 자리에 있을 필요가 없는 정당성을 찾기에 바쁩니다. 궁금함이 없고, 갈망함이 없습니다.
이런 모습은 둘중에 하나입니다. 내게 ‘하나님의 씨’가 없든지, 아니면 사단에 속아서 ‘죄의 본성’대로 쾌락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결과는 영혼이 상해서 자신에 대해서는 자기 교만, 상대방을 향해서는 분노, 그로 인해서 관계가 다 틀어지는 독불장군식의 악만 남아버리는 것이죠. 무슨 일이 일어나면 모두가 상대방이 다 잘못된 것이고, 이해심이 없다고 치부해버립니다. 저주의 대상이 되버리죠.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와 아무 상관이 없는 모습입니다. 주님을 소망하는 사람은, 주님이 다시 오실때를 기대합니다. 그 모습을 사모하기에 그는 이 땅에서 더욱더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을 살아가려고 합니다. 그 모습은 의를 행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미 우리안에 계신 예수님으로 인해 죄가 사해졌고, 사단을 멸하셨기에, 우리는 더 이상 죄와 상관없는 사람들입니다. 더 이상 죄가 나를 지배하지 않고, 예수님이 지배하시니, 나의 관심은 당연히 예수님에게로 향합니다. 소망이 되고, 몸부림이 됩니다. 갈망과 목마름이죠.

‘갈망’은 내가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내안에 누가 지배하고 있는가에 대한 증거입니다. 세상을 갈망하면, 세상이 그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죠. 성탄절에 아이들이 온통 선물에 관심을 가지고, 말할때마다 선물을 이야기하는 것은 선물이 그의 생각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무엇을 갈망하고 있나요? 무엇에 갈급해하고, 헐떡거리고 있나요? 그것이 그의 영혼을 좌우할 것이 뻔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것을 할수 있을까? 이것을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이 아닐까? 그래도 예수님을 닮아가야지?…이런 ‘의를 행하는 모습’이 나오겠죠. 그리고, 그 사람이 힘들어할 것같은데 먼저 가서 미안하다고 해야하지 않을까? 이것이 필요할 것같은데 가져다줘야겠다, 힘들텐데 기도해줘야겠다, 바쁠텐데 내가 대신 거들어줘야겠다…이런 ‘이웃을 사랑하는 모습’이 나오겠죠.

예수를 알면서도 세상에 헐떡거리며 좇아가는 사람은, 돈 100불을 손에 쥐고 있으면서도 춥고 배고프다고 벌벌떨면서 굶고 있는 사람처럼, 오히려 세상이 이해하지 못하는 불쌍한 인생이지 않을까 싶어요.

저에게 한가지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생명의 년수와 사역의 연수대로 이 땅에서 살면서 ‘건강, 오래삶, 큰 교회, 자식성공’이 아니라, 생활속에서, 사역속에서 예수님을 더 닮아가고, 예수님을 더 알아가는 즐거움에 빠져가는 것입니다. 성공과 사역열매와 상관없이, 그 즐거움이 나를 천국에 대한 소망으로 더 헐떡거리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자녀된 인생에 가장 큰 성공이요, 대박난 인생이 아닐까요!

그럼, 이 땅에서 나의 갈망은 무엇인가요?